80년대
이 당시(1988년) 주식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표다
세계 50위 기업 가운데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고 더구나 20위 위로는 일본 기업이 자그마치 16개에
게다가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의 3배가 넘었다.
이 때 한국의 GDP(국내총생산)는 2023억 달러로, NTT 시가총액의 70% 수준에 불과하다.
아무리 당시 한국이 신생 공업국이었다고 하더라도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의 GDP가 일개 기업의 시가총액보다도 못하다는 점에서 버블경제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GDP가 나머지 아시아 전체 GDP보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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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 당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썰이다
지금부터 30-40년전의 이야기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 이력서만 내면 무조건 합격 되었다
- 면접만 보면 무조건 합격 되었다
- 아르바이트 책이 전화번호부 보다 두꺼웠다
- 1년 신입의 연봉이 2천만엔 (2억원) 이었다
- 건설업 노동자는 1년 연봉이 4천만엔(4억원) 이었음에도 인력이 부족했다
- 대학생이면 기업에서 직접와서 스카웃 제의를 했다
- 면접본다 전화만 주면 1만엔 (10만원)의 교통비가 우편으로 지급 되었다
- 면접보면 무려10만엔 (100만원)의 면접비가 나왔고 100군대 면접 돌아 다니면서 외제차 뽑은 사람도 있었다
- 고등학생 세뱃돈이 30만엔(300만원) 이상 이었다
- 중산층도 자녀에게 대학 입학선물 외제차 선물로 할 정도 였다
- 파티나 행사도중 근처에 서성 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10만엔(100만원) 주고 자기파티 초대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 사이에 남의파티에 돈도 벌고 뽕도뽑는 파티족이 유행 하기도 했다
- 알바로 먹고살고 돈이 필요할때만 일하는 프리터가 유행하였다
- 백수에게 매달 50만엔 (500만원) 의 지원금이 나왔다
- 땅이나 주식 담보로 하면 부르는데로 대출을 받을수 있었다
- 얼굴 몸매 좀 되는 여자가 혼자 다니면 중년 남자들이 온갖 돈다발을 주면서
사귀어 주면 초명품 사준다면서 헌팅하는 풍경이 흔했다
- 여자가 데이트 할때 빈손으로 나가면 남자가 다 내고
헤어질때 여자에게 꽃다발과 수십만엔(수백만원)의 용돈을 쥐어주기 까지 했다
- 어떤 제품이던 무조건 제일 비싼것 부터 팔렸다 심지어 편의점이나 서점에서 잡지를 살때 내용도 안보고 다짜고짜
제일비싼걸루 주세요 라고 했을정도
- 어느 가계나 오는 손님마다 일단 젤 비싼거 먼저 보여주세요 라고 했다
- 과거 버블 경제 시절, 도요타에 입사하면 신차를 공짜로 줬다는 믿기 힘든 전설.
- 은행에 연리 5%이상 되는 상품도 흔했지
*2020년 현재 일본의 금리는 -0.1%다 이자를 주기는 커녕 오히려 돈을 더 내야된다
- 택시기사 연봉이 800만엔 (8000만원) 정도던가?
- 요즘 애들은 절대 못 믿겠지만 공무원 하면 사람들이 개무시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 스키장이 대성황이라서 주차장에 들어가는 것만 정체로 2시간 걸리는 일도 흔했어
- 너무 미친듯이 전 세계에서 돈을 버는 바람에 각국에서 빈축을 사는 통에
「일본이여, 쉬자」 같은 캠페인을 정부가 주도해서 할 정도였고 그런데도 돈이 남아돌았다
- 회사에 이력서만 썼다하면 모두 채용되는 통에 아차하면 몇 십개 회사에 동시 채용되어서
어떻게 하면 완곡하게 입사를 거절하는가에 대한 메뉴얼 책도 나왔을 정도.
- 딱히 부자집 아들도 아니었던 대학생이 뉴욕에서 헬기를 타고 샴페인을 한 손에 들고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레벨이었다.
- 이자카야같은 곳에서도 선뜻 5만엔 (50만원)을 사용하던 수준
- 기업에게 접대까지 받아가며 어쩔 수 없이 취직해 준 레벨
- 20대에 연봉 천만엔 (1억)이었다
- 전철 야마노테선 공사로 인해 땅을 팔게 된 대가로, 고작 35평 팔고 20억엔(200억)
- 대학입학 축하로 외제차를 사주는 세계
- 빈부격차가 엄청났었다. 요즘 말 많은 빈부격차는 그저 코웃음만 나올 정도?
- 취업면접은 기업 측에서 먼저 연구실까지 와서 데려가던 시절. 심지어 면접 중에 졸아도 취업이 되었다.
-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 세배돈이 30만엔 (300만원)을 넘겼었다
- 입사 시험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합격했다
- 회사의 면접에 간다. 교통비 신청으로 1500엔(15000원)정도를 쓴다.
대략 10번 면접가면 1만 5천엔 (15만원) 정도가 들어온다. 어떤 바보들은 100개 정도의 회사를 돌아서 중고차를 샀다.
- 우수한 인재를 뽑은 회사의 경우에는 하와이로 장기 여행을 보내주는 회사도 있었다.
해외에 있으면 그 이상 다른 회사에 취직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물론 기업이 여비나 식비, 숙박비 등 모든 비용을 댔다.
- 알바로 먹고사는 프리타(알바)가 멋있는 이미지를 가졌던 것도 버블시대 이야기?w
-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같은 느낌? 심지어 영화화 되기도 했지.
- 닛케이 평균주가
1989년 38,915(종가)
1990년 23,848(종가)
2020년 24,325 ( 11월 6일 종가)
*30년만에 전고점 돌파 ㄷㄷㄷ 1990년 버블 꼭대기에 주식을 샀으면 30년동안 물려있다가 이제야 본전
- 정직원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이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던 시대니까.
그리고 사실 당시 중소기업의 제조업은 대단한 불경기였다.
일손부족으로 면접에 온 놈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는 쓰레기 뿐이었지. 정말로 비참했었어.
- 89년 당시의 잡지를 갖고 있어서 훑어봤더니
여자들이「남친의 연봉은 2천만엔 (2억)정도면 충분해요」라고 말하고 있어w
- 신제품이 나오면, 비싼 것부터 순서대로 팔려나갔다.
비디오를 갖고 싶다! → 제일 비싼 건 어떤 거?
집은 뭘 사지?→제일 비싼 걸로 하기로 할까
왜 그걸 샀어? → 제일 비싸서
이정도.
- 그 시절은 일이 너무 많아 정말 바빴다. 매일 잔업에다 한달에 이틀 정도 밖에 휴일이 없었어
- 일손이 부족해서 도산하는 회사가 실존했던 것 같은데
- 흑자 도산이라는 말이 실존하던 시대라고w
- 여자들은 남자들하고 놀라가도 빈 지갑만 들고가도 됐어.
돈은 전부 남자가 내주고, 돌아갈 때는 지갑에 현찰 다발을 꽃아줄 정도였으니까.
- 정기예금의 금리가 8%가 넘었다.
게다가 변동성 금리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8%의 이자로 살고 있는 우리 할머니는 삶의 승리자.
*2020년 현재 일본의 이자는 -0.1% 즉 은행에 돈을 맡기면 오히려 추가로 돈을 내야됨
- 지금은 니트인 나도 한달에 30만~40만엔(300만~400만원)의 봉급을 받을 수 있던 시대.
차를 사고, 당시의 아키하바라에 가서 PC부품을 매달 마구 사제꼈다.
식사는 적당히 외식, 주말에는 어디던지 시간 무제한 드라이브.
1만엔 지폐를 하루에 몇 장 쓰는지도 모를 정도로 생활하면서도 더 저금할 여유가 있었어
그런데도 당시에는 가난하다는 소리를 들었어. 맨날 똑같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 소비지출로 미국을 뛰어넘었던 꿈의 시대. 그것이 버블경제 시대.
- TV프로그램도 심한 것들이 많았지. 가난한 가족들에게 초호화 생활을 경험하게 해주고 그 반응을 살핀다던지.
천박한 사람이 많았던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 누구나 주식에 뛰어들어서, 주부를 대상으로 한 주식강좌는 언제나 예약이 곧바로 마감될만큼 대인기.
맨션에 살고 있었는데 몇 개의 부동산 업체에게 전화가 와서「값이 오를텐데, 댁의 견적을 뽑아보게 해주십시요」
- 쇼와 59년(1984년) , 조금 무리해서 샀던 1,900만엔(1억9천)짜리 맨션이 2년 후에 6,000만엔(6억)
*참고로 80년대 압구정 현대아파트 34평 가격이 약 3600만원 정도이다
- 요트나 크루저가 미친듯이 팔려나갔지만 정작 즐기는 사람은 없어서 자택이나 직장에 비를 맞게 내버려
두고, 심지어 사놓고 단 한번도 바다에 띄워본 적 없는 오너도 많았어.
- 집이나 토지를 사고 싶다고 은행에 말만 하면 거의 무심사로 계속 융자를 해줬지.
- 경기가 워낙에 좋다보니 젊은 이들도 적당히 편한 일에 종사하기 위해 블루칼라 직업들은 일은 넘쳐나는데
일손이 부족해서 도산이 속출.
- 고졸의 스무살 도장공이나 목수 견습생 급여가 월 40만엔 (400만원)을 넘겼어. 그런데도 일할 사람이 없었던 시대.
- 도쿄의 23개 구의 땅 값>미국 전 국토의 땅값
진짜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사실이라고 들은 것 같다.
일본 2천년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 세계의 기업 TOP 10을 전부 일본 기업이 차지하고 있었다
- 시가총액이 NTT 주식>서독의 모든 회사 주식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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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현재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재산은 약 7조
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 당시 일본 세이부 그룹의 츠츠미 요시아키 회장은 약 22조
*일본의 지하철 세이부선도 이 회사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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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경제 시절에 대한 2ch의 회상.
우리나라로 치면 1997년 외환 위기 직전인 1996년 호황기를 생각해보면 된다. 완전히 똑같다기보단 시대상이 이랬다 하고 보면 된다. 비유해서 그야말로 "진무 천황 이래 최고의 호황기"였다.
외제차 수입이 급증해 벤츠 주력 모델이던 W201 190E는 너무 많이 보급돼 '코벤츠'로 불렸으며 BMW E30은 롯폰기 코롤라란 별명이 붙었다.여담으로 이 두 차량은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한국에도 수요가 넘쳐서 이때 나왔던 물건을 이삿짐 명목으로 들여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스포츠카들의 수요도 대폭 증가했는데. 국내에선 수프라와 NSX, 스카이라인 GT-R. RX-7, 미쓰비시 GTO 등이 수요들을 노리고 제작이 되었으며. 외제쪽에선 페라리와 포르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테스타로사와 911의 수요가 엄청 많았고. 특히 플래그 쉽에 한정생산이였던 F40과 959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당시에 출시된 이륜차 역시 초고성능 및 고가의 파츠로 도배되었다. 400cc나 250cc 의 저배기량에서 4기통엔진을 쓴다거나 온갖 호화로운 부품은 현재 나오는 것과 비교해도 넘사벽의 포스를 갖고 있었다.
호기로 술집 단골 아가씨에게 그 자리에서 가게 하나를 내준다는 말도 있었다.
프리터도 이 때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 면접만 받으러 가도, 교통비로 쓰라며 3~5만엔 (30만~50만원)을 꽂아주는 시대였으니 면접만 보러다니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
테마파크도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노동 시간 최장 국가 중 하나였고 당시에는 주당 44시간 노동제였기 때문에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에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건 당연했는데, 국내외에서 여러모로 지적 받는 일이 많아지자 1987년 주5일제 도입을 시작으로 차츰 노동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기가 버블이랑 겹치면서 여가 시간도 늘어나고 돈도 넘쳐서 테마파크붐이 일게 된 것. 후나바시 시에는 일본 최대의 실내 스키장인 자우스가 생기는가 하면 미야자키 현에는 한때 세계 최대 워터파크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오션 돔이 생겼다. 하우스텐보스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생겼으며, 그 외에 여러 지방 도시에 테마파크나 박물관이 들어섰다. 물론 80년대 초에 생긴 도쿄 디즈니랜드가 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일조한 듯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품이 꺼진 뒤 하나둘씩 망했고, 오션돔도 거품이 꺼지더니 세계 최대 워터파크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파리만 날리다 2000년대 중후반 망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더 안습인 건 탄광산업이 사양세로 접어들 때 생명줄로 버블을 타고 볼거리를 유치하려다 그 볼거리마저 거품이 꺼지자 도시까지 끌고가서 망한 동네도 있다. 천조국 본점 후광 도쿄 디즈니랜드 정도만 제외하면 버블시대에 생긴 테마파크 중 살아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불황때문에 여전히 힘들다. 하우스텐보스조차 예전만 못하다고.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대형시설이 2010년대 이후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여기로. 굳이 장점을 꼽자면 도시권역을 개발하고도 돈이 남다 보니 지방도시까지 퍼져서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문화 인프라가 많이 확충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인구 감소가 만회된 건 아니라서 지금 대가를 치르는 중. 앞서 말한 테마파크의 난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일본기업의 아이디어가 기발하거나, 독창적인 제품을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버블경제의 영향이라 분석도 있다. 기업이 기술부문에 투자하고도 남아도는 잉여의 돈으로 괴상한 제품을 만든 것. 그 시절 일본의 자동차, 제품 등을 보면 그저 돈지랄로 보이는 게 많다. 물론 당시로서는 일본의 화려한 발전에 눈이 멀어 마냥 우러러 보는 시선이었지만.
일본인의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병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애정이, 돈과 인력을 때려박아 매머드급으로 팽창한 것도 이 시기였다. 매년 2월 중순 혹은 하순에 도쿄의 실내체육관인 료고쿠 국기관에서 5,000명(!)의 합창단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국기관 5천명의 제9 콘서트(1985~),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큰 이벤트 홀인 오사카성 홀에서 10,000명(!!)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산토리 1만명의 제9(1983~), 히로시마 최대의 이벤트홀인 히로시마 선플라자에서 1,000~2,000명 규모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제9 히로시마(1985~) 같은 이벤트성 공연이 시작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이 때의 영향으로 수많은 가수들이 교향곡 9번의 An Die Freude를 일본어로 커버했으며, 일본어 커버 버전뿐만이 아니라 독일어 원곡 버전도 일본제 노래방 전기종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